
2025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수상자
2024년 프랑스의 마리안 게티(Marianne Getti)와 아녜스 나밧 (Agnes Nabat) 두 영상기자는 전쟁이 안겨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에티오피아 북부의 티그라이 지역에 잠입했다.
티그라이전쟁(Tigray war)은 에디오피아(Ethiopia)정부군, 에트레아(Eritrea)정부군, 그리고, 에티오피아 북서부에 위치한 암하라주의 파노민병대(Amhara Fano militia)가 연합해, 2020년 11월 2일 북부 에티오피아의 티그라이주를 침공하며 시작되었다. 2022년 11월 3일까지 2년간 이어진 전쟁은 6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21세기 최악의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목격자 없는 전쟁’을 만들기 위한 에티오피아 정부의 철저한 미디어통제와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사회의 낮은 관심으로 인해, 크게 주목받지 못 해왔다.
아프리카 최대 인구를 가진 에티오피아와 주변 국가들 사이에 오랜 기간 반복되어 온 여러 종족 간의 갈등과 대립의 역사는 에티오피아 현대사의 정치적 변동과 복합되어, 종족 간의 증오와 복수심을 증폭시켜 왔다. 그 결과로 발발한 티그라이전쟁’은 ‘인종청소’를 목표로 내건 21세기 아프리카판 ‘홀로코스트’가 되고 말았다.
에티오피아 인구의 6%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인 티그라이인들을 ‘인종청소’하기 위해, 反티그라이 연합군은 티그리아군과 민병대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마구잡이로 살인하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201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비 아흐메드(영어: Abiy Ahmed) 에티오피아 대통령이 주도한 反티그라이연합군에 의해 자행된 티그라이인에 대한 인종청소는 대학살에 멈추지 않고, 티그라이 여성인구의 1/10에 달하는 12만 명 이상의 여성들이 성폭력 당하고, 성적가해를 당하는 반인도적 전쟁범죄로 이어졌다.
티그라이인의 탄생과 재건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목적으로 ‘자궁학살’이라고 까지 불리는 성적가해가 티그라이 여성들에게 자행되었다. 티그라이 전쟁 중 티그라이 여성들에게 가해진 성폭력과 성적가해는 反티그라이 연합군의 조직적인 명령으로 사용된 ‘침묵의 무기’가 되었다.
게티 마리안느(Getti Marianne)와 나밧 아그네스 (Nabat Agnes) 두 영상기자는 강력한 언론통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에티오피아 정부를 통한 비자발급을 포기하고, 전쟁성범죄의 피해여성들의 목소리와 사연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최소한의 취재장비와 핸드폰만을 들고 비밀스럽게 티그라이로 들어갔다.
두 영상기자는 전쟁성범죄로 피해입은 수천 명의 생존자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여성활동가와 공공병원의 간호사를 만나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티그라이전쟁의 ‘전쟁성범죄’의 구체적 양상과 규모를 영상에 담아 고발했다.
목숨을 건 취재를 통해, 두 영상기자는 反티그라이 연합군이 ‘자궁학살’을 자행하며 사용한‘면도칼, 못, 탄피, 티그라이여성들을 증오하는 쪽지삽입물’ 등의 잔혹한 전쟁범죄의 증거물들을 최초로 영상에 담아 세상에 공개했다.
또한, 두 영상기자는 피해여성들을 직접 만나, 反티그라이 연합군이 자행한‘전쟁성범죄’로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전쟁 후, 가족과 사회로부터 위로받고, 치유 받지 못한 채, 오히려, 가족과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며 이중적 고통과 차별에 처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합작 공영방송채널인 ‘ARTE-TV’를 통해 2024년 11월 방송된 이 보도는 그동안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티그라이전쟁’의 반인류적 ‘전쟁성범죄’에 대해 국제사회가 제대로 그 진실을 파악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상처를 끌어앉고 살아가는 티그라이의 전쟁성범죄 피해자들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기기 위해 국제적 연대와 지원이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025 힌츠페터국제보도상 심사위원들은 이 보도가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티그라이전쟁’의 전쟁성범죄와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피해여성들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고통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또, 전쟁성범죄의 구체적 증거들을 최초 영상취재, 보도함으로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피해자들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지원을 위한 여론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기대했다.
심사위원들은 접근하기 위한 티그라이 지역에 목숨을 걸고 들어가, 피해여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증언을 취재, 보도한 두 영상기자의 활동은 1980년 힌츠페터기자가 오월광주를 취재, 보도한 기자 정신과 맞닿아 있다며 이들의 보도‘침묵의 무기’를 2025힌츠페터국제보도상의 대상인 ‘기로에 선 세계상’의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박현철(SBS), 임채웅(MBN), 박재현(JTBC), 김우성(아리랑TV)
지난해 12월 3일 밤 10시 23분,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국회 출입 영상기자들은 일정을 중단하고 모두 국회로 향했다. 경찰의 봉쇄를 피해 국회 담을 넘고, 동료가 붙잡히는 상황도 겪었다. 일부 기자들은 경찰이나 계엄군의 도움으로 통제되지 않은 곳을 통해 진입하기도 했다. 이들은 국회 내에 도착한 후 영상기자실 열쇠를 찾아 카메라와 장비를 챙겼고, 단체 채팅방을 통해 상황과 진입 경로를 공유했다.
국회영상기자단은 1,2,3풀단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초유의 상황에 공동취재를 결정했다. 취재 영상은 모든 풀단의 송출망을 개방해 동시에 송출했고, MNG 장비를 활용해 국민에게 계엄 상황을 신속하게 전달했다. 46명의 기자 중 30명이 국회에 모여 12•3 계엄의 밤을 기록하기 위해 본관 안팎으로 흩어졌다.
밤 11시, 계엄사령부포고령 제1호는 언론 통제와 가짜뉴스 금지를 명시해 언론의 자유를 위협했다. 계엄의 현장을 취재하는 것은 처벌의 두려움과 유혈 사태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과 보좌진, 그리고 동료들을 보며 두려움을 이겨냈다. 일부 기자들은 계엄군이 본관으로 진입할 것을 예상해 본관으로 들어갔고, 뒤늦게 온 기자들은 보좌진의 도움을 받아 밧줄을 타고 장비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진입하기도 했다.
밖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은 군 헬리콥터와 무장한 계엄군을 마주하며 극도의 공포를 느꼈지만, “내가 기록하는 모든 순간이 역사가 될 것”이라는 사명감으로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계엄군의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며, 이는 추후 계엄 사태를 분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12월 4일 자정을 넘어 계엄군의 본관 진입 시도가 본격화되자, 기자들은 곳곳에 흩어져 시민과 보좌진의 모습을 취재했다. 국회방송의 중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본회의장에는 단 한 명의 영상기자만 남아 긴박한 상황을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 이들의 영상은 TV, 유튜브,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세상에 전달되었다.
새벽 1시 3분, 참석 의원 190명 전원의 찬성으로 '계엄해제요구결의안'이 가결되었다. 이 소식은 실시간으로 국회 안팎에 전해졌고, 계엄군은 빠르게 철수하기 시작했다. 국회 밖에서는 영상기자들 외에 다른 방송사 기자들과 뉴스 중계팀도 풀 중계를 통해 상황을 보도했다. 한국영상기자협회는 이날 국회 안팎에서 취재에 참여한 영상기자들의 공적을 각 사에서 추천 받아 ‘민주주의를 지킨 48인의 영상기자들’로 칭하고 제38회 한국영상기자상 대상을 수여했다.
심사위원들은 ‘계엄’을 내세운 쿠데타 상황에서 용기를 내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현장에서 기록하고, 세상에 알린 한국영상기자들의 기자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한국사회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기, 자유사회의 붕괴 위기를 현장에서 신속하게 취재, 보도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림으로서 시민과 정치인, 쿠데타에 동원된 군인들에게 급박한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을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해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한국의 영상기자와 언론인들이 제대로 취재, 보도하지 않은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고, 진실의 전달자, 역사의 기록자로서 자기 사명을 다한 점 등을 들어 뉴스상의 수상자로 결정했다.
“갱단의 지배를 뚫고 이뤄낸 핵심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무법지대 속 붕괴한 아이티의 현실을 정면으로 고발. 극심한 위협 속에서 제작된 이 작품은 뛰어난 완성도로 그간 주목받지 못한 분쟁을 집중 조명한다.”
작품은 시청자를 붕괴된 도시, 포르토프랭스 한가운데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몰입형 다큐멘터리다. 갱단이 80% 이상을 장악한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참혹한 현실을 심층적으로 고발한다. 2024년 5월 헬기를 타고 현장에 잠입 취재하여 제작됐다.
기자들은 최소 장비와 인원으로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접근 불가능한 구역을 취재하며, 총격과 약탈 현장, 갱단 통제 구역, 피난민 수용지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또한 수주간 협상 끝에 갱단 지도자들과의 대면 인터뷰에 성공해 살인, 강간, 납치, 정치·재계 인사와의 연계 등 범죄 사실을 밝혀내고 생생하게 고발했다. 제작진은 갱 폭력 생존자, 강간 피해자 등 수십 명을 개별적으로 인터뷰하여 생생한 증언을 확보했다.
폭력과 참상의 기록을 넘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아이티 시민들의 삶을 찾아 그 속에 꺼지지 않는 회복력도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갱단 지역 출신 조각가, 화가의 삶을 따라가며, 폐허 속에서 작품을 복원하는 아이티 예술계의 숨은 저력을 조명한다.
방송 직후 작품은 유튜브에서 63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프랑스24를 통해 영어, 불어, 스페인어, 아랍어로 송출되어 전 세계적으로 1억 명 이상이 시청했다. 특히 갱단 지도자들의 범죄 자백 장면은 유엔 전문가 패널 보고서에 증거로 인용되며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언론의 주목도 이어졌다. 《타임(Time)》은 카트린 노리스 트랑이 쓴 기사를 게재했고, 프랑스 매체 《텔레라마(Télérama)》는 다큐멘터리를 “필수적이고 강렬한 작품”이라 평가했다. 프랑스 공영 라디오 France Culture와의 심층 인터뷰 등 다양한 매체에서 인용 보도됐다.
“아동들을 향한 정밀 조준 사격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언과 의료 기록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이스라엘 군의 전쟁 범죄 혐의에 대한 탐사 기록. 결과는 참혹하고 파괴적이지만, 부상에서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녀의 노력과 같은 회복의 순간들이 한줄기 희망을 비춘다.”
작품은 네 살 소녀 미라 알다리니가 가족 텐트 바깥에서 놀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국제 언론의 접근이 차단된 지역에서 현지 취재팀과 협력해 촬영을 감행한 제작진은 의료 영상과 환자 기록, 자원봉사 미국인 의사 20명의 증언을 통해 반복되는 어린이들의 총상이 교전 중에 발생한 우연한 피해가 아닌 계획적 조준사격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제작진은 SNS, CCTV 등 다양한 증거 영상을 공개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특히 미라를 치료한 한 의사는 “머리와 가슴 부위에 집중된 총상 패턴은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하며, 치료를 마친 뒤 다시 가자지구로 돌아가 부상에서 회복한 미라와 재회하는 장면은 관객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그들은 참혹한 전쟁 범죄의 중단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 의회를 찾아가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채 “납세자의 세금이 학살에 사용되고 있다”는 무력감을 토로한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인권법률인 레히 법(Leahy Law)이 한 차례도 이스라엘에 적용된 적 없다는 사실도 폭로한다. 법 제정자와 32년 경력의 전직 국무부 관리 인터뷰를 통해 해당 법의 사각지대를 드러낸 뒤, 마지막에는 인터뷰이가 “도덕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참회를 이끌어 낸다.
현장 취재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제작진은 반복된 공습경보 속에서 카메라를 멈출 수밖에 없었고, 세 차례 공격을 받은 미라의 어머니는 결국 다리를 잃는 피해를 당하게 된다. 한편 이 다큐멘터리는 NPR ‘Reveal’ 라디오 프로그램으로도 각색되어 미국 전역에 방송됐다.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컬럼비아 저널리즘 스쿨 등 주요 기관 상영을 통해 언론인, 정책 입안자, 인권 옹호자, 학생들 사이에 책임과 면책의 문제를 놓고 활발한 토론을 촉발했다.
* 유영길상은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미국 CBS 소속으로 사건의 참상을 보도한 유영길 영상기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유영길 영상기자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꽃잎’의 촬영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천안문사태와 탱크맨 - 중국의 마지막 시민혁명을 세계로 생중계하고, 꺾이지 않는 민주화 상징을 세상에 알린 영상기자들
신디 스트랜드, 조나단 쉐어, 윌리 푸아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이 추진한 10년에 걸친 개혁-개방정책은 사회주의혁명 이후, 글로벌경제체제에서 퇴장했던 중국을 단시간에 세계경제체제에 복귀시키는 경제적 성과를 가져왔지만, ‘권력의 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정치, 경제적 불평등과 위기를 동반했다.
이에 대한 대중들의 개혁요구를 옹호하다 실각했던 후야오방(Hu Yaobang) 전 공산당 총서기가 1989년 4월 15일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정치적 자유 확대, 권력형 부정부패청산,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촉발되게 된다.
4월 17일,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며 북경대에 모였던 대학생들의 집회 뒤 이어진 천안문광장까지 행진은 그동안 정부에게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해 왔던 학생과 지식인은 물론이고, 일반시민과 공무원들까지 참여하는 ‘천안문사태’로 발전하며 6월 4일까지 이어지게 된다.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전국화될 조짐이 보이면서, 사태해결을 촉구하는 국제적 여론과 정치적 압력이 커져 갔다. 이런 상황과 맞물려 1987년 이웃나라인 한국에서 일어난 시민항쟁의 결과 군사독재정권이 붕괴하면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소련과 동구권이 개혁, 개방정책을 통해 기존의 공산당 1당독재체제가 급변하는 상황은 중국 공산당정부의 지도자들에게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마침내 중국정부는 5월 20일 북경지역 등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 새벽 사이 총기와 탱크, 장갑차로 무장한 정부군을 천안문광장에 투입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킨다. 그 과정에서 중국 당국의 공식발표로만 41명의 사망자, 부상자 7,000명, 외신과 국제구호단체에 따르면 1000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30,000명에 이르는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국의 20세기 마지막 시민혁명은 군인들의 총과 탱크 앞에서 미완의 혁명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천안문광장의 시위대가 무력으로 진압된 다음날인 6월 5일 낮, 수십만의 시민들을 내쫓고, 총을 든 군인들과 탱크들이 천안문광장의 공기를 공포와 위협으로 점령한 순간, 무력시위하며 행진하던 탱크들의 대열 앞으로 한 청년이 나타나 온 몸으로 가로막는 예상치 못 한 사태가 발생한다. 군의 총부리와 탱크의 강압 앞에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국시민들의 저항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전 세계인들에게 ’탱크맨‘으로 불리는 청년의 저항은 ’꺽이지 않는 중국인들의 민주화의지‘를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자, 중국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중국정부의 폭압을 이겨내고 다시 타오를 것이라는 강한 메세지를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켰다.
20세기를 상징하는 10대 사건에 뽑히기도 했던 ’탱크맨‘의 강렬한 이미지는 중국을 넘어, 불의한 권력과 압제에 맞서는 시민의 자유의지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
①신디 스트랜드(Cynde Strand) CNN영상기자
- ‘천안문사태’의 한 가운데서 기록한 진실을 같은 시간을 사는 세상에 알리다-
신디 스트랜드는 대학졸업 후, 중국에 유학을 하다, 1987년 신생매체인 24시간 뉴스채널인 CNN의 베이징 지국이 설립되면서 영상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1989년 4월 17일 밤, 북경의 대학생들이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행사를 열고 천안문광장으로 행진하는 상황을 현장에서 취재해 미국언론 최초로 영상보도 했다. 전 세계를 향해 CNN이 보도한 중국의 심각한 사태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이목을 집중시키게 만들었다. 신디 스트랜드는 ‘천안문사태’의 전 과정을 역사의 기록자, 목격자로서 현장의 한 가운데서 취재, 보도했다.
특히, 천안문광장의 시위가 한창인 5월 15일에 예정되었던 고르바쵸프 소련 당서기장의 역사적인 중국방문과 중-소정상회담을 전 세계에 뉴스생중계하려고 중국당국의 허가를 받았던 신디와 CNN의 취재진들은 중-소정상의 만남 대신, 베이징의 한 가운데인 천안문광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시민항쟁을 전 세계로 생생하게 전달하게 된다.
신디 기자의 영상보도와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에 전달된 천안문의 진실은 이 사태에 무관심했던 미국 부시행정부와 전 세계 정부와 시민들에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하며 이 사태가 파국적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가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을 벌여야 한다는 여론을 만들었다. 또, 6월 4일 중국당국의 유혈진압 사태 이후, 주동자들에 대한 구속과 처형이 잇따르자, 이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구명활동이 이루어지게 했다.
1989년 6월 3일 밤, 정부군의 무력진압으로 천안문광장에 젊은 학생과 시민들이 군이 발포한 총탄에 피흘리며 쓰러져 가고, 장갑차와 탱크가 질주하면서 많은 이들이 죽고 부상당하는 상황에서도 신디 기자는 사태가 마무리된 6월 4일까지 천안문광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역사를 기록했다. 그녀는 당시의 심정을 훗날 이렇게 이야기한다.
“(현장에 있다는 것) 이것이 기자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역사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뉴스의 현장에 서 있지 않는 다면, 진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②조나단 쉐어(Jonathan Schaer) CNN영상기자
-중국시민들의 꺽이지 않는 민주화의지의 상징이 된 ‘탱크맨’을 기록하다-
천안문광장의 시위가 장기화 되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여러 나라의 언론사들은 5월말과 6월초, 대대적으로 취재진을 파견하게 된다. CNN 애틀란타 본사의 영상기자였던 조나단 쉐어도 특파되어 천안문광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현장에서 기록해 전했다. 하지만, 6월 4일 대대적인 군인들의 진압작전이 시행되면서, 취재진을 향한 군인과 탱크의 발포가 이뤄지자 그는 동료들과 천안문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호텔로 취재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6월 5일 낮, 천안문광장을 바라보는 순간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안문광장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여러 대의 탱크행렬 앞으로 남자가 다가갔고, 본능적으로 카메라의 초점을 그에게 맞추었다.
남자는 탱크를 가로막아 섰고, 탱크들은 자신들을 막아선 남자를 피해 가려 했지만, 남자는 탱크를 따라가며 가로막았고, 쉐어 기자는 이 숨막히는 순간을 자신의 카메라에 생생한 영상으로 기록했다. 군인과 탱크에서 발사하는 총격의 위협을 무릅쓰고 기록한 원본을 압수하기 위해 중국공안이 들어닥쳤고, 쉐어와 CNN취재진은 취재영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호텔을 탈출했다. 새롭게 도착한 은신처에서 영상캡쳐송신장비를 이용해 취재영상의 스틸 프레임을 캡처해 전화선으로 전송했다.
영상 프레임 한 컷을 캡쳐해서 전화선으로 송신하는 데는 45분이나 걸리는 열악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쉐어 기자가 전송한 사진파일은 CNN을 통해 전 세계에 매시간 뉴스속보로 방송되었다. 또, 취재원본테잎을 섭외된 관광객을 통해, CNN홍콩지국에 전달하는데 성공하면서, 6월 5일 천안문광장 한 가운데서 중국정부의 무력과 탄압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는 ‘탱크맨’의 용기와 의지가 전 세계의 안방에 전달되었다.
③윌리 푸아(Wille Phua) 前호주ABC 영상기자
-아시아의 위기, 변화를 기록해온 전설의 영상기자‘탱크맨’을 알리다
윌리 푸아(Willie Phua)는 아시아 현대사의 격동기를 기록한 전설적인 영상기자로 호주 ABC 뉴스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 크메르 루주 정권,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 붕괴 등 아시아 전역의 주요 분쟁과 민주화 운동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1989년 6월 5일, 윌리는 베이징 호텔 10층 발코니에서 인민해방군의 탱크 행렬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때, 쇼핑백을 든 한 시민이 탱크 앞에 홀로 서서 행진을 막아섰다. 윌리는 숨을 죽이며 그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시민은 탱크 위로 올라가 승무원들과 대치했고, 탱크가 움직이자 다시 앞으로 달려들어 길을 막았다. 결국 몇몇 구경꾼들이 그를 끌어내어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고, 그는 렌즈 프레임에서 사라졌다.
이 영상은 중국 당국의 위성 송출 차단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경로를 거쳐 뉴스영상전문통신사인 비스뉴스(Visnews)홍콩지국에 전달되었다. 그의 영상은 호주ABC는 물론이고, 공동 취재 계약을 맺고 있던 Visnews, BBC, NBC 등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졌다.
윌리 푸아가 기록해 보도한 ‘탱크맨’은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천안문광장을 메운 시민들의 저항이 군의 폭압으로 가 좌절되었지만, 그 의지와 여망이 결코 꺾이지 않고, 다시 불타오를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저항의 상징’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 되었다.
안타깝게도 윌리 푸아는 2024년 12월 27일 9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영상기자로서의 삶을 마쳤고, 그가 취재한 ‘탱크맨’의 영상은 호주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천안문사태’와 중국시민들의 개혁과 민주화의 요구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세 사람의 영상기자는 천안문사태가 무력진압에 따른 극도의 혼란과 군에 의한 생명의 위협, 취재활동에 따른 체포와 구금을 당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진실보도를 위해 현장을 지키고, 영상취재함으로서 5.18광주민화운동의 현장에서 직접 취재해 고립되고 박해받는 ‘오월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힌츠페터 기자의 업적과 뜻을 같이 하는 기자정신을 실현했다. 또한, 천안문사태 취재제한과 검열, 원본압수의 조처에 맞서, 자신들이 취재한 영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생방송보도, 비상계획과 수단을 이용해 영상을 송출, 전달해 언론의 자유를 실현하는 노력과 그 결과물들은 천안문사태의 진실과 진실규명을 위한 중요한 기록이 되었다. 힌츠페터, 유영길의 취재영상이 1980년대를 넘어 2024년 12.3계엄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 모두에게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떠올리고,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역사적 기억을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이끌어 12.3계엄내란사태를 극복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
두 사람의 영상보도는 앞으로 중국의 민주적 발전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역사적 기억으로 남을 것으로 평가했다. 또한, 1989년 생방송으로 전 세계에 전달된 천안문사태는 뉴스이슈의 세계화, 동시화를 통해 세계인들이 특정지역, 로컬적 사안을 인류보편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국제적 여론을 빠르게 형성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변화를 가져왔으며, 뉴스생중계의 강화를 위한 시도와 노력은 취재, 보도 장비의 기술적 발전과 전쟁, 분쟁보도 등 지역적 뉴스의 세계화를 가져 왔다는 언론사적 의미도 크다고 평가했다.